왕상 (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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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왕상(王常)은 신나라 말기에 녹림군에 참여하여 하강병을 이끌었고, 한나라 부흥에 기여한 인물이다. 동생의 원수를 갚기 위해 강하군으로 피신했다가 녹림군에 합류했으며, 성단, 장앙과 함께 하강병을 결성했다. 유수의 설득으로 유씨를 옹립하는 데 동참하여 연합군의 승리에 기여했고, 경시제 정권에서 정위, 대장군 등을 역임했다. 이후 광무제에게 귀순하여 여러 전투에서 활약했으며, 횡야대장군에 임명되기도 했다. 그는 신중하고 검소한 성품과 용맹함으로 평가받았으며, 36년에 사망하여 절(節)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왕상(王常)은 신나라 말기부터 후한 초기까지 활동한 인물로, 동생의 원수를 갚기 위해 강하군으로 도망쳤다가 왕광, 왕봉 등과 녹림군을 결성했다. 성단, 장앙과 함께 녹림군의 분파인 하강병(下江兵)을 이끌며 신나라에 저항했다. 하강병은 한때 패배했지만, 세력을 재건하여 형주목을 격파하고 남양군 의추취(宜秋聚)에 주둔했다.[1]
신중하고 겸손하며 검소한 성품을 지녔지만, 용맹하고 과감한 전투를 여러 차례 보여준 장군이다. 하강군(下江軍) 시대에 설득 협상을 위해 온 유연과 '''단금'''[2]의 교분을 맺었다고 한다.
[1]
서적
後漢書
2. 생애
유수와 이통의 설득으로 유인을 중심으로 한 용릉병, 평림병, 신시병과 연합하여 곤양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1] 이후 녹림군은 경시제를 황제로 추대했고, 왕상은 정위·대장군, 지명후(知命侯)에 봉해졌다. 24년(경시 2년)에는 장안 천도 후 남양태수를 대행하고 등왕(鄧王)에 봉해지면서 유씨 성을 하사받았다.[1]
경시제 정권 멸망 후, 왕상은 광무제에게 항복하여 좌조(左曹)에 임명되고 산상후(山桑侯)에 봉해졌다. 이후 한충장군(漢忠將軍), 횡야대장군(橫野大將軍) 등을 역임하며 등봉, 동흔, 외효, 노방 등 여러 반란 세력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웠다.[1] 36년(건무 12년), 왕상은 주둔 중 사망했으며, 시호는 절(節)이라 했다.[1]성명 왕상(王常) 시대 신나라 시대 - 후한 시대 생몰년 생년 미상 - 36년 (건무 12년) 자·별호 안경(顔卿) (자), 유상(劉常) (사성 후) 본관·출신지 등 예주영천군 무양현 직관 편장〔왕광〕→〔하강군 수령〕 →정위 (후에 남양태수 일을 겸임)〔경시〕 →좌조〔후한〕→한충장군〔후한〕 →횡야대장군〔후한〕 작위·호 등 지명후〔경시〕→ 등왕〔경시〕 →산상후〔후한〕→ 산상절후〔사후〕 진영·소속 등 왕광→〔독립 세력〕→경시제→광무제 가족·일족 부: 왕박 자: 왕광
2. 1. 녹림군 봉기 및 하강병 결성
왕광, 왕봉 등과 함께 녹림군을 결성했다. 나중에 성단, 장앙과 함께 남군 남구(藍口)로 옮겨, 이 녹림군의 분파를 하강병(下江兵)이라 불렀다. 신나라에서 보낸 장우, 진무(陳茂) 등에게 격파당했으나, 성단, 장앙과 함께 흩어진 무리를 수습해 누계(蔞谿)로 숨어들어 종산(鍾山)과 석룡산(石龍山) 사이를 약탈하며 세력을 재건하고 형주목을 상당향(上唐鄕)에서 무찔러 북진해 남양군 의추취(宜秋聚)에 주둔했다.[1]
녹림군의 다른 분파인 평림병과 신시병이 남양군의 전한 종실이 일으킨 용릉병과 합세해 신나라의 전수대부(한나라 식으로는 남양태수) 진부·전수속정 양구사와 싸웠으나 소장안취에서 대패했고, 평림병과 신시병은 용릉병과의 연합을 해산하려 했다. 의추취에 있던 하강병에게 용릉병의 지도자 유인이 보낸 사자 유수와 이통이 찾아와 하강병의 지도자가 용릉병을 찾아와 의논할 것을 청했고, 장앙과 성단의 추대를 받아 왕상이 유인을 방문했다. 왕상은 유인에게 설득되어 유씨를 주인으로 추대하기를 원했고, 자립하기를 원하는 성단과 장앙을 설득해 함께 한나라를 부흥하는 데 참여하게 했다. 하강병은 왕상을 존경했기에, 왕상이 없이는 하강병은 불의함에 빠질 뿐이라며 마침내 왕상의 뜻대로 평림병·신시병·용릉병과 연합하기에 이르렀다. 하강병의 합세로 기개를 되찾은 녹림군은 23년 2월 22일(음력 1월 1일) 신군을 무찌르고 진부와 양구사를 모두 참수했다.
2. 2. 녹림군 연합 참여 및 경시제 정권 수립
신나라 말, 왕상은 동생의 원수를 갚고 강하군으로 도망쳐 숨어 지냈다. 그러다 왕광, 왕봉 등과 함께 녹림군을 결성했다. 이후 성단, 장앙과 함께 남군 남구(藍口)로 이동했는데, 이 분파를 하강병(下江兵)이라 불렀다. 하강병은 신나라 군대에 패하기도 했지만, 세력을 재건하여 형주목을 격파하고 남양군 의추취(宜秋聚)에 주둔했다.
한편, 평림병과 신시병이 용릉병과 연합하여 신나라군과 싸웠으나 패배했고, 연합이 해산될 위기에 처했다. 이때 광무제가 된 유수와 이통이 하강병에게 찾아와 용릉병과의 연합을 제안했다. 왕상은 유인의 설득에 따라 유씨를 주인으로 추대하기로 하고, 성단과 장앙을 설득하여 한나라 부흥에 참여하게 했다. 하강병은 왕상을 존경했기에 그의 뜻에 따라 평림병, 신시병, 용릉병과 연합했다. 연합군은 23년 2월 22일(음력 1월 1일) 신나라군을 격파하고 진부와 양구사를 참수했다.
이 승리 후, 녹림군은 황제 옹립을 논의했는데, 왕상은 유인을 추천했으나 주유 등과 장앙 등이 유현을 추천하여 경시제로 즉위했다. 왕상은 정위·대장군에 임명되고 지명후(知命侯)에 봉해졌다. 곤양 전투에서는 유수의 지휘 아래 왕봉과 함께 성을 지켰으며, 유수가 곤양을 포위한 신군을 격파하는데 기여했다.[1]
24년(경시 2년), 장안 천도 후 왕상은 남양태수를 대행하며 주벌과 포상 권한을 받았다. 2월에는 등왕(鄧王)에 봉해지고 유씨 성을 하사받았다.
2. 3. 경시제 정권에서의 활약
신나라 말기에 동생의 원수를 갚고 강하군으로 도망쳐 숨어 지내다가, 왕광, 왕봉 등과 함께 녹림군을 결성했다. 나중에 성단, 장앙과 함께 남군 남구(藍口)로 옮겨, 이 녹림군의 분파를 하강병(下江兵)이라 불렀다. 신나라에서 보낸 장우·진무(陳茂) 등에게 격파당했으나, 성단·장앙과 함께 흩어진 무리를 수습해 누계(蔞谿)로 숨어들어 종산(鍾山)과 석룡산(石龍山) 사이를 약탈하며 세력을 재건하고 형주목을 상당향(上唐鄕)에서 무찔러 북진해 남양군 의추취(宜秋聚)에 주둔했다.
한편, 녹림군의 다른 분파인 평림병과 신시병이 남양군의 전한 종실이 일으킨 용릉병과 합세해 신나라의 전수대부(한나라 식으로는 남양태수) 진부·전수속정 양구사와 싸웠으나 소장안취에서 대패했고 평림병과 신시병은 용릉병과의 연합을 해산하려 했다. 의추취에 있던 하강병에게 용릉병의 지도자 유인이 보낸 사자 유수(후의 광무제)와 이통이 찾아와 하강병의 지도자가 용릉병을 찾아와 의논할 것을 청했고, 장앙와 성단의 추대를 받아 왕상이 유인을 방문했다. 왕상은 유인에게 설득되어 유씨를 주인으로 추대하기를 원했고, 자립하기를 원하는 성단과 장앙을 설득해 함께 한나라를 부흥하는 데 참여하게 했다. 하강병은 왕상을 존경했기에, 왕상이 없이는 하강병은 불의함에 빠질 뿐이라며 마침내 왕상의 뜻대로 평림병·신시병·용릉병과 연합하기에 이른다. 하강병의 합세로 기개를 되찾은 녹림군은 23년 2월 22일(음력 1월 1일) 신군을 무찌르고 진부와 양구사를 모두 참수했다.
이 승전 후 녹림군은 황제를 옹립하기로 했는데, 왕상은 남양의 사대부들과 함께 유인을 추천했으나, 주유 등 평림병·신시병의 지도자들과 장앙 등이 평림병 수하의 유현을 추천함에 따라 유현이 황제로 세워졌다(경시제). 왕상은 현한 정부에서 정위·대장군에 임명되었고, 지명후(知命侯)에 봉해졌다.[1] 여남군, 패군 일대로 진출했다가 왕읍·왕심 등이 거느린 신나라의 진압군이 곤양을 노리자 곤양으로 돌아왔다. 곤양 일대의 현한군을 지휘하는 유수의 명으로 성국상공 왕봉과 함께 성을 지켰는데, 유수는 야음을 틈타 성을 나가 구원군을 긁어모았으나 유수가 돌아오기 전 왕봉과 왕상은 신군의 공격을 견디지 못해 항복하려 했는데, 신나라는 왕봉과 왕상의 항복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사이 돌아온 유수가 곤양을 포위한 신군을 무찔러 곤양성을 구원했다(곤양 전투).[2]
24년(경시 2년) 장안으로 천도하면서 왕상이 남양태수를 대행하면서 주벌과 포상할 권한을 받았고, 2월에 이성제후왕을 봉하면서 남양군 등현(지금의 샹양시 샹저우구 북서) 등 8현을 받아 등왕(鄧王)에 봉해졌으며 유씨 성도 하사받았다.
2. 4. 후한 광무제 휘하에서의 활약
신나라 말기에 동생의 원수를 갚고 강하군으로 도망쳐 숨어 지내다가, 왕광, 왕봉 등과 함께 녹림군을 결성했다. 나중에 성단, 장앙과 함께 남군 남구(藍口)로 옮겨, 이 녹림군의 분파를 하강병(下江兵)이라 불렀다. 신나라에서 보낸 장우, 진무(陳茂) 등에게 격파당했으나, 성단·장앙과 함께 흩어진 무리를 수습해 누계(蔞谿)로 숨어들어 종산(鍾山)과 석룡산(石龍山) 사이를 약탈하며 세력을 재건하고 형주목을 상당향(上唐鄕)에서 무찔러 북진해 남양군 의추취(宜秋聚)에 주둔했다.[1]
한편, 녹림군의 다른 분파인 평림병과 신시병이 남양군의 전한 종실이 일으킨 용릉병과 합세해 신나라의 전수대부(한나라 식으로는 남양태수) 진부·전수속정 양구사와 싸웠으나 소장안취에서 대패했고 평림병과 신시병은 용릉병과의 연합을 해산하려 했다. 의추취에 있던 하강병에게 용릉병의 지도자 유인이 보낸 사자 유수(후의 광무제)와 이통이 찾아와 하강병의 지도자가 용릉병을 찾아와 의논할 것을 청했고, 장앙와 성단의 추대를 받아 왕상이 유인을 방문했다. 왕상은 유인에게 설득되어 유씨를 주인으로 추대하기를 원했고, 자립하기를 원하는 성단과 장앙을 설득해 함께 한나라를 부흥하는 데 참여하게 했다. 하강병은 왕상을 존경했기에, 왕상이 없이는 하강병은 불의함에 빠질 뿐이라며 마침내 왕상의 뜻대로 평림병·신시병·용릉병과 연합하기에 이른다. 하강병의 합세로 기개를 되찾은 녹림군은 마침내 23년 2월 22일(음력 1월 1일) 신군을 무찌르고 진부와 양구사를 모두 참수했다.[1]
이 승전 후 녹림군은 황제를 옹립하기로 했는데, 왕상은 남양의 사대부들과 함께 유인을 추천했으나, 주유 등 평림병·신시병의 지도자들과 장앙 등이 평림병 수하의 유현(경시제)을 추천함에 따라 유현이 황제로 세워졌다. 왕상은 현한 정부에서 정위·대장군에 임명되었고, 지명후(知命侯)에 봉해졌다. 여남군, 패군 일대로 진출했다가 왕읍·왕심 등이 거느린 신나라의 진압군이 곤양을 노리자 곤양으로 돌아왔다. 곤양 일대의 현한군을 지휘하는 유수의 명으로 성국상공 왕봉과 함께 성을 지켰는데, 유수는 야음을 틈타 성을 나가 구원군을 긁어모았으나 유수가 돌아오기 전 왕봉과 왕상은 신군의 공격을 견디지 못해 항복하려 했는데, 신나라는 왕봉과 왕상의 항복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사이 돌아온 유수가 곤양을 포위한 신군을 무찔러 곤양성을 구원했다(곤양 전투).[1]
24년(경시 2년) 장안으로 천도하면서 왕상은 남양태수를 대행하면서 주벌과 포상할 권한을 받았고, 2월에 이성제후왕을 봉하면서 남양군 등현(지금의 샹양시 샹저우구 북서) 등 8현을 받아 등왕(鄧王)에 봉해졌으며 유씨 성도 하사받았다.[1]
경시제 정권이 적미의 공격으로 패망하자, 26년(건무 2년) 낙양으로 가서 광무제(황제가 된 유수)에게 항복하고, 포상을 받고 좌조(左曹)에 임명되었으며 산상후(山桑侯)에 봉해졌다. 한충장군(漢忠將軍)이 되어 등봉과 동흔 토벌의 총대장이 되었다. 또 하간과 어양을 쳤다.[1]
29년(건무 5년) 가을에는 호릉을 함락했고, 임성에서 광무제를 만났으며 소무와 방맹 공격에 종군했다. 또 하비를 쳤을 때, 왕상의 군대는 분투하여 용맹을 떨쳤다. 또 기도위 왕패를 지휘해 패군의 도적을 쳤다.[1]
30년(건무 6년) 광무제의 명으로 전쟁을 그치고 무양의 집으로 돌아간 후, 다시 출진해 장안에서 외효를 막았다. 31년(건무 7년)에는 횡야대장군(橫野大將軍)에 임명되고 장군들 중 가장 높은 자리에 놓였다. 외효의 별장 고준(高峻)을 조나현에서 무찌르고, 외효의 또 다른 장수를 오지(烏氏)에서 요격해 무찔렀으며 강족들의 여러 군영을 항복시켰다.[1]
33년(건무 9년)에는 내황의 도적을 진압했고, 후에는 북으로 가 고안에서 대나라 왕 노방을 막았다. 36년(건무 12년) 주둔 중 죽어, 시호를 절(節)이라 했다.[1]
3. 평가
참조
[2]
서적
易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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